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콤 엑스 (문단 편집) == [[마틴 루터 킹]]과의 비교 == [[파일:external/static.guim.co.uk/Martin-Luther-King-Jnr-an-007.jpg]] 1964년 워싱턴 의회 입구에서 만난 흑인 인권운동의 두 거인. 이것이 두 사람의 유일한 만남이다. 출신이나 성장과정, 인권운동 노선이 달랐던 탓에 여러 모로 킹 목사와 비교되기도 하고 라이벌로까지 몰아가기도 하며 두 사람은 서로 인권운동노선에 비판을 많이 가하기도 했지만, 정작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적은 단 한 번밖에 없다. 그나마도 단 5분도 되지 않았으며 진지한 토론을 한 것이 아니라 서로 인사하고 허허 웃으며 사진을 찍은 것 정도가 전부다. 어쨌든 당대의 맞수로 몰아가기도 했고, 서로 비판을 많이 가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운동노선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인해 말년에는 각자의 노선 방향의 한계를 인식하고 다른 인권운동 노선을 모색하고 서로 단결하고 노력하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킹 목사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적극적인 투표권 운동과 구조적 빈곤의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했으며 말콤 엑스도 백인을 무조건 적으로 대하는 자신의 생각을 고치고 킹 목사의 인권운동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 이념적으로도 킹 목사는 [[기독교 사회주의]]자였으며, 맬컴 X도 네이션 오브 이슬람 탈퇴 이후에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말년의 엑스 역시 그런 점을 직접 지적하기도 했다. > '''"나의 운동과 킹 목사의 비폭력 운동은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목표는 항상 같다. 그 목표는 백인이 무방비상태의 흑인에게 저지르는 만행과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다. 이 나라의 이런 풍토에서, 흑인 문제에 대한 '두 극단적 접근방식'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 즉, '비폭력'의 킹 목사인지, 이른바 '폭력적'이라는 나인지는 -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의 앞선 흑인운동 선배 격이었던, 당대에는 과격하다고 평가받은 이상주의자 [[W. E. B. 듀보이스]]와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던 [[부커 T. 워싱턴]]이 연상되는 부분이 많다. 실제로 그 둘도 매우 대립하는 사이였다. 사실 사상적인 측면으로 보면 생애 후반부로 갈수록 공유하는 점이 더 많아졌던 킹-엑스 보다 저 한세대 전의 흑인 계몽운동 지도자 둘은 본격적인 사상적 갈등도 심했다. 부커 워싱턴의 경우 소위 '실력 개량주의'의 전형이라 할 만큼 상업과 교육을 통한 흑인들의 '실력 양성'을 추구했고 정치적 평등운동은 배격했던 반면, 두보이스[* 첨언하자면 발음상 프랑스식 '뒤 부아'가 아니라 무조건 영어식 '두 보이스'로 발음된다. 본인이 살아 생전부터 사람들이 햇갈려 했으며 일부로 "난 미국에서 자란 영어 모어화자니깐 두 보이스가 맞습니다"라 쓰인 친필 성명서까지 남겼을 만큼 미국 현지에서도 햇갈려 한다.] 같은 경우 말콤 엑스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사상적 대부라 부를 만큼 정치적, 민권 평등 투쟁 자체에 적극적이었으며, 사회주의를 비롯한 당대의 급진 좌파, 세계적 반제국주의 운동과도 연관이 깊었다. 두 사람은 묘한 부분에서 극명한 대비를 보이기도 하는데, 엑스는 사생활이 깨끗했던 데 비해서 마틴 루터 킹은 간음 등 여자 관계에 대한 루머가 좀 있었던 편이다. 그래서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 <말콤 X>에서는 엑스와 그 아내의 통화 내용을 도청하던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이 킹 목사에 비하면 성인군자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부분이 있다. 마틴 루터 킹은 측근 및 자서전의 저자조차도 실드 쳐주지 못할 만큼 난잡한 성생활 및 불륜이 약점으로 지적되는 반면에 말콤 엑스는 평생 아내만을 사랑하였으며 불륜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환경에 있었음에도 단 한 차례의 추문에도 휩싸인 적이 없었다. 이런 부분 말고도 서로가 대상으로 했던 흑인 내부 집단 또한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킹 목사는 전통적인 대규모 농업 중심으로 먹고 살고, 노골적으로 같은 화장실, 식수대, 버스 좌석도 못 쓰게 하던 인종 차별 법안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던 남부의 흑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했으며, 그에 따라 그가 선택한 방식도 자연스럽게 여전히 남부에서 인종을 초월하여 짙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복음주의 기독교였다. 반면 말콤 X는 소수라지만 한창 미국의 공업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수 많은 흑인들을 끌어 모으며, 그중에서 적게나마 교육받은 중산층도 존재했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하긴 했지만 남부처럼 대놓고 같은 화장실도 못 쓰게 법으로 해놓지는 않았던 [[필라델피아]], [[뉴욕]], [[보스턴]], [[시카고]], [[디트로이트]] 등 북부의 도시 노동자 흑인들을 대상으로 당시 전 세계를 휩쓸던 좌파 혁명론과 접목된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사실 이렇기 때문에 양적인 면만 두고 킹 목사가 더 중요했다, 엑스가 더 중요했다 갑론을박하는 거 자체가 무의미한 게, 엑스가 기반으로 두고 활동한 세속화된 도시 프롤레타리아도 물론 중요한 사회 집단이긴 하지만 숫적으로 보면 [[흑인 대이동]]을 겪었어도 예나 지금이나 미국 흑인들이 많은 지방은 복음주의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한 남부이기 때문이다. 말콤 X와 마틴 루터 킹 비교 분석한 서적으로는 제임스 콘이라는 미국의 신학자가 지은 <말콤 엑스 VS 마틴 루터 킹>(원제: Martin & Malcolm & America)이 읽어볼 만하다. 킹과 말콤의 일생과 인권 운동을 함께 서술한 [[평전]]이라서 킹 목사와 엑스의 일생과 사상, 미국 흑인인권운동 이해에 도움이 된다. 또한 소설 [[뿌리(소설)|뿌리]]의 작가이자 말콤 X의 자서전을 구술한 알렉스 헤일리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흥미있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당시 헤일리는 엑스의 측근으로 간주될 정도로 그와 가까운 사이였고, 인권 운동 관련 사안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만날 기회도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데, 킹 목사는 헤일리를 만날 때마다 '말콤 형제가 나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고 물어보았다고 하며, 엑스 역시 헤일리가 킹 목사를 만나고 돌아오면 항상 '킹 목사가 나에 대해서 뭔가 한 이야기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알렉스 헤일리에 의하면 활동 후반기의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행동에 큰 영향을 주고 받고 있음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양 쪽 모두 상대방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킹 목사는 자신의 자서전인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에서 말콤 엑스에 대해서 그의 폭력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철학적 전제조건을 재평가하고 비폭력운동과 일반적인 백인들에 대한 경직적인 태도를 개선하던 중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고 끝내 유능한 지도자를 잃었다고 상당히 아쉽다는 표현을 했다. 둘은 죽음조차 3년의 차이는 있지만 암살로 같았다. 말콤이 4살이 더 많기에 둘 다 40세가 되기 직전에 죽었다. 일반적으로 마틴 루터킹은 비폭력적이고, 말콤 엑스는 폭력적이란 인식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틴 루터 킹은 유복한 집안에서 모범적인 성장기를 보냈으나 흑인민권운동에 뛰어든 후부터 독방에 투옥되기도 하는 등 고초를 겪은 반면, 말콤 엑스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며 유년시절 감옥에 밥먹듯이 드나들었으나 흑인민권운동에 뛰어든 후부턴 단 한번도 투옥 혹은 체포된 적이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